여성 운동가들은 가부정적 사회에서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약하고 열등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차별을 당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온 여성 운동가와 페미니스트를 방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최소 두 배나 많은 시간을 가사 일에 사용한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여성 근로자는 남성 근로자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14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고용률은 남성은 72%인데 반해 여성의 47%였다.
더불어 전 세계 173개국 중 155개국에서 여성의 경제적 기회를 제한하는 법적 차별성이 최소 한 가지 이상 존재한다는 내용도 발표된 바 있다. 그중 100가지 법률은 여성이 특정 직업을 갖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으며 18가지 법률은 남편에게 아내의 직업 허용을 반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정치 및 리더십 측면에서 여성의 역할 및 지위는 매우 낮았다. 사실 지금도 전 세계 의회에서 여성의 비율은 23.3%에 불과하다.
또한 여성은 지금도 매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살해되는 여성의 38%는 남편이나 애인이 범인이다. 그리고 전 세계 여성 3명 중 한 명꼴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여성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사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여성 불평등을 근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여성의 임금 수준을 남성만큼 높이면 세계 GDP는 28조 달러 (3경 2,914조 원)이 추가될 것이다.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성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과거 여성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 운동가는 혁명 운동이 일어났을 때 항상 중요한 역할을 도맡아 했다. 역사상 수천여 명의 여성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적인 체제에 맞서 싸웠다. 다음은 역사적으로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던 여성 운동가에 대한 내용이다.
머시 오티스 워렌 (1728~1814): 미국독립혁명의 양심
매사추세츠주 웨스트 반스테블의 교양 있는 가문 출신인 머시 워렌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으로 알려졌으며 역사상 ‘진정한 천재’라고 불렸다. 그녀는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풍자극과 시를 집필해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예를 들어 머시 워렌이 최초로 발표했던 연극 ‘아첨꾼’은 인디펜던스의 요청으로 집필된 것이다.
워렌은 여성권 운동의 선구자이자 권리장전의 옹호자, 자유를 갈망한 투사이자 애국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던 시절, 여성 운동의 선봉에 섰다.
셀리아 산체스 (1920~1980): 쿠바 혁명의 영웅
쿠바 오리엔테에서 태어난 셀리아 산체스는 쿠바 혁명가이자 기록학자, 연구원이자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산체스는 쿠바 혁명 당시 정치력과 혁명 정신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쿠바의 국가적 정체성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산체스는 쿠바의 여성들이 신체적 노동일과 가사일, 여성성과 리더십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산체스는 평생을 쿠바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녀는 1952년 벌어졌던 바티스타의 쿠데타 이후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독재에 맞서 투쟁했다. 그리고 반군을 이끌었던 최초의 쿠바 여성으로 활약했다.
캐슬린 닐 클리버 (1945~현재): 흑표단의 근본주의 운동가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태어날 캐슬린 닐 클리버는 운동가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쉽게 노출될 수 있었다. 클리버는 성장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여러 가지 신념을 배웠으며 이후 사회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흑표당의 일원으로 잘 알려진 클리버는 여러 해 동안 각종 시위를 조직하고 언론을 상대하며 팸플릿을 제작하고 집회에서 연설했다.
클리버는 여러 권의 책도 발표했으며 에모리법학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추근 (1875~1907): 중국의 잔다르크
추근은 부유한 중국 여성이자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추근은 가부장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이 억압당하고 정치적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좌절감을 겪어야 했다. 자신과 같은 여성은 자국 내에서 배울 수도 없고 스스로를 내세울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 입학했으며 자신과 뜻이 맞는 중국 혁명가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부패한 중국 정부를 전복할 생각을 품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1906년 중국으로 돌아온 추근은 혁명 지도자로 변모해 폭탄 제작술로 유명해졌으며 검술을 익혔다. 그리고 근본주의 페미니스트 잡지인 ‘중국 여성지’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 31세에 청 왕조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참수형을 당했다.